찌그러진 깡통
오늘의 주제는 '찌그러진 깡통'이다.
나는 찌그러진 깡통이다. 처음 '찌그러진 깡통'라는 수식어를 들은 날은 대학교 2학년 중간 크리틱 때였다. 한참을 모진말을 쏟아낸 뒤 교수님은 아무말도 못한 채 서 있는 나를 향해 찌그러진 깡통같이 왜 아무말도 못하냐고 했다. 용수철 같이 튀어 올라 계속 받아치기를 바라셨던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못마땅해 했다.
그때 못했던 말들을 지금 떠올려본다.
'하지만 나는 틀렸고, 당신 말은 다 맞았는데 내가 어떻게 무슨 말을 하겠어요. 나는 사실 건축 설계 하기도 싫고, 하루 먹고 살기도 바빠서 내 통장 속의 잔액만 머리 속에 있는 걸요. 이제 신문사도 그만 둬서 저는 학원에서 버는 25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돼요. 중간마감 모델을 만들기 위해 2만원을 썼고, 어제부터 밤을 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까운지 몰라요. 못난 작품이라도 있고 그 앞에 서있는 것만으로 저는 충분해요. 당신이 뭐라고 해도 저는 그냥 무사히 오늘이 지나가고 별탈없이 이번 학기를 마치는 것이 꿈이에요. 나의 꿈에 위대한 건축가가 들어올 여유따위는 없어요.'
하지만 그 때는 21살의 찌그러진 깡통이 그대로 찌그러진 채 25살이 될거라는 생각은 못했다. 관성이라는 것이 사람의 내면에도 있는 건지 나에게 들어오는 모진말들은 더 나를 찌그러뜨렸다. 직장인으로서의 나는 더 볼품 없었다. 비판인지 비난인지 모를 모든 말들을 긁어 모아 나를 찌끄러뜨렸다. 급기야 더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을 때 그만뒀다.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아내지 못할 것 같다. 조금만 담아도 흘려넘쳐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.
에세이에서는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고 다른 식으로 해석하지만, 그저 볼품없는 찌그러진 깡통은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. 결국엔 사회에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야 만 것 같은 슬픔, 다른 사람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아우성, 나만 다른 것 같은 외로움들이 나를 둘러싼다.